마사다는 이스라엘 유대 사막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었던 요새이다.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국의 지배에 맞서 유대의 독립을 쟁취했던 하스몬 가문의 왕자들이 이곳을 수비대의 주둔지로 삼음으로써 요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본격적인 요새를 건설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유대를 지배했던 헤로데 왕이다. 헤로데 왕은 유대인이 아니고 에돔 출신의 로마 지방 장관 안티파테로스의 아들이었지만, 로마인들은 조세 징수를 확실히 하기 위해 그를 유대 왕국의 왕으로 삼았다.
66년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에 폭력 투쟁으로 맞설 것을 주장하던 열심당원들이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그들 가운데 일부는 성벽 밑을 지나는 땅굴을 통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탈출했다. 그들은 마사다에 다다라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수비대를 물리쳤다.
이어서 로마인들과 타협한 공식적인 유대교를 거부하는 에세네파 유대인들이 그 반란 집단에 합류했다(에세네파는 세례자 요한, 즉 예수에게 세례를 받고 나중에 유대 왕비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요청에 따라 목이 잘렸던 예언자를 배출한 유대인 공동체였다). 마사다 요새에서 에세네파와 열심당원들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자주 관리 공동체를 건설했다.
70년, 유대인들의 대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로마인들은 마사다 요새를 반란자들의 소굴로 여기고 소탕 작전에 나서기로 했다. 로마의 유대 주둔군 사령관 실바 장군이 10군단을 이끌고 유대 왕국의 마지막 자유인들을 토벌하기 위해 진군했다. 마사다 농성전은 3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에세네파와 열심당원들의 공동체는 로마군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다 결국 항복을 거부하고 집단 자결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가 비통한 종말을 맞기 직전에 에세네파 일부가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역사와 지식을 기록한 문서를 가져가서 사해 연안의 쿰란 지구에 있는 동굴에 감췄다. 그 뒤로 2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한 양치기 청년이 길 잃은 양을 찾으러 동굴에 들어갔다가 사해 문서라 불리는 그 유명한 두루마리들을 발견했다. 이 문헌들에는 "태초부터 계속되어 온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 사이의 전쟁"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에세네파의 일원이었던 예슈아 코헨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33세까지 에세네파의 교리를 전파하다가 로마인들에게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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