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가 혼자서 아테나를 낳자, 그것에 샘이 난 헤라는 자기도 제우스와 동침하지 않고 혼자서 수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헤파이스토스를 낳았다1). 이 이름은 "불타는 자" 또는 "빛나는 자"를 뜻한다. 헤라의 배 속에서 나온 아기는 허약하고 생김새가 매우 흉했다. 헤라는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아이를 죽이려고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서 바다로 던져 버렸다. 아이는 렘노스 섬에 떨어져 살아남았지만, 한쪽 다리가 부러졌고 그 때문에 영원히 절름발이가 되었다.
바다의 정령인 테티스와 에우리노메는 아기를 거두어 바닷속의 동굴로 데려갔다. 헤파이스토스는 이 동굴에서 9년 동안 자라며 대장장이와 마법사의 일을 연마했다. (불구가 된 대장장이의 이야기는 스칸디나비아와 서부 아프리카의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옛날에는 대장장이를 마을에 붙들어 두기 위해, 그리고 혹시라도 적득과 협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불구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헤라는 수련을 끝낸 아들을 올림포스로 불러들이고, 스무 개의 풀무가 밤낮으로 가동되는 세계 최고의 대장간을 마련해 주었다. 이 대장간에서 헤파이스토스는 금은 세공술과 마법의 걸장들을 만들어 냈다. 그는 불의 지배자이자 야금술과 화산의 신이 되었다.
그는 자기를 더 일찍 데려오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을 삭이지 못하고, 어머니를 겨냥한 함정을 고안했다. 누구든 앉기만 하면 마법의 사슬에 옥죄이는 황금 옥좌를 만든 것이었다. 헤라는 아들이 보낸 이 옥좌에 앉았다가 사슬에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풀려나기 위해 아들을 올림포스 신족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헤파이스토스는 올림포스의 모든 신을 위해 자기 솜씨를 발휘했다. 제우스의 방패, 아르테미스의 활과 화살,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아테나의 창 등이 그의 대표적인 공적이었다.
그는 진흙을 빚어 최초의 여자 판도라를 만들기도 했고, 황금으로 여자 모양의 자동 기계 장치를 제작하여 조수로 쓰기도 했다. 또 아킬레우스에게 방패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킬레우스는 이 방패를 가지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헤파이스토스에게서 청동 로봇 탈로스를 선물로 받았다. 이 로봇의 몸속에는 목에서 발목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혈관이 있었다(이 혈관은 밀랍이 흐르게 하기 이해 조각가들이 사용하는 기법을 연상시킨다). 탈로스는 매일 세 번씩 뜀박질로 크레타 섬을 일주하면서 해안에 정박하러 오는 침략자들의 배를 물리쳤다. 한 번은 사르디니아 사람들이 크레타 섬에 침입하여 불을 지른 적이 있었다. 그때 탈로스는 불 속에 뛰어들어 제 몸을 벌겋게 달군 뒤, 적들을 하나씩 끌어안아 모두 태워 죽였다2).
헤파이스토스는 어느 날 헤라와 제우스가 다투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말다툼에 끼어들어 어머니 편을 들었다. 성난 제우스는 그를 올림포스 산 아래로 던져 버렸다. 그는 다시 렘노스 섬에 떨어졌고 한쪽 다리가 마저 부러졌다3). 헤파이스토스는 목발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두 팔은 더욱 단련되고 힘이 붙어서 대장장이 일에 아주 유용했다.
1) 이것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헤시오도스의 버전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는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다.
2) 탈로스의 이야기는 "신통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아폴로도로스의 "신화집"과 동로마 제국의 백과사전 "수다"에 나오는 이야기를 합쳐 놓은 것이다.
3) 이 대목과 앞에서 헤라가 아이를 던지는 대목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헤파이스토스의 불구에 관한 두 가지 설명을 합쳐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헤파이스토스를 렘노스 섬에 던진 신이 누구인가를 놓고 호메로스는 두 가지로 노래한다. 헤파이스토스가 제우스로부터 어머니를 구해 주려고 할 때, 제우스가 그의 "발을 잡고 신성한 하늘의 문턱에서 내던졌다"하기도 하고, 절름발이인 그를 없애려는 "어머니의 사악한 속셈 때문에 멀리 추락하여 고통을 당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베르베르는 이 두 대목을 결합하여 헤파이스토스가 두 차례 떨어져서 양쪽 다리가 차례로 부러진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5.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 세이렌과 인어 (26) | 2025.02.04 |
---|---|
29. 역사를 보는 눈 (10) | 2025.02.03 |
27. 거울 (10) | 2025.02.02 |
26. 티폰 (18) | 2025.02.01 |
25. 죽음 (24) | 2025.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