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다섯 종족이 시대를 달리하여 생겨났다. 최초의 인간들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서 나왔고1), 그들과 더불어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들은 크로노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대지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풍족하게 대주었다. 그들은 노동이나 질병이나 노화의 괴로움을 겪지 않았고, 죽을 때도 마치 잠을 자듯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 시대는 화관을 쓰고 풍요의 뿔을 들고 있는 처녀로 상징된다. 처녀의 옆에는 평화를 나타내는 올리브나무가 서 있고, 이 나무에서는 꿀벌들이 떼를 지어 붕붕거린다. 이렇듯 최초의 인류는 황금시대의 종족이다. 황금은 태양, 불, 낮, 남성적인 원리 등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 다음으로 은 시대의 종족이 나타났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크로노스가 몰락한 뒤에 이 종족을 창조했다. 그들은 품성이 거칠고 이기적이었으며, 신들을 공경하지 않았다. 이 시대는 밀 다발을 든 채 쟁기를 다루고 있는 여자로 상징된다. 은은 달, 추위, 다산성, 여성적인 원리와 연관되어 있다.
제우스는 은의 종족을 멸하고 새로운 종족을 창조했다. 이로써 청동 시대가 열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방탕하고 불의하고 사나웠다. 그들은 결국 서로 싸우고 죽이다가 파멸하고 말았다. 이 시대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투구를 쓴 채 방패에 등을 기대고 있는 여자로 상징된다. 청동의 주원료인 구리는 뜨거움이나 음탕함 등과 연결된다. 지옥을 그린 어떤 그림들을 보면 액체로 된 구리를 마시는 죄인들이 나오며, 음란의 죄를 범한 자들은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다가 뜨거운 구리 기둥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다음에 프로메테우스가 새로운 종족을 창조함으로써 철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훨씬 더 사악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쩨쩨하고 비열했으며, 서로 속이고 싸우고 죽이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지는 제대로 가꿔 주지 않아서 불모의 땅으로 변했다. 철의 시대는 늑대의 머리를 얹은 투구를 쓰고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방패를 든 무시무시한 여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제우스는 이 못된 종족을 없애 버리기로 결심하고 대홍수를 일으켜 대지를 물에 잠기게 했다. 다만 가장 바르고 의롭게 살아 온 한쌍의 남녀만은 살려주기로 했다. 남자는 프로메테우스와 클리메네의 아들 데우칼리온이었고, 그의 아내는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딸 피라였다. 그들은 방주를 타고 9일 밤낮을 표류한 끝에 살아남았다. 마침내 홍수가 끝나고 물이 빠졌을 때, 그들은 제우스가 시키는 대로 어깨너머로 돌을 던졌다. 이 돌들에서 다섯째 종족이 생겨났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수많은 후손을 두었다. 헬레네스족의 시존 헬렌, 도리스족의 시조 도로스, 아카이아인들의 시조 아카이오스 등이 그 후손이다.
1) 인류의 창조를 다룬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장 중요한 문헌은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이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최초의 인류는 신들이 태어나자마자(또는 신들과 함께) 생겨났고, 올림포스의 신들이 인류를 위해 황금시대를 열어 주었다. 오비디우스는 두 가지 설을 제시한다. 인류는 더 나은 세계를 구상하던 창조주가 신의 씨앗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고, 프로메테우스가 천공에서 갓 떨어져 나온 대지 속에 아직 남아 있던 천상의 요소를 빗물로 반죽해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인류가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서 나왔다는 말은 오비디우스의 두 번째 설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류의 시대를 구분한다는 방식에서도 베르베르는 "영웅시대"를 설정하지 않은 오비디우스의 바식을 따르고 있다. 다만 데우칼리온과 피라의 후손을 다섯째 종족으로 보고 있는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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